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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화 내가 누군지 알아?
구층 존재가 자꾸 투덜대자 엽현 역시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형씨, 고작 이런 거 가지고 투덜대십니까. 그 나이에 뭐 사춘기라도 온 거야?] [고작 이런 거!?] 구층 존재가 버럭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너는 내가 어떻게 수련해 왔는지 아느냐? 아주 조그마한 비경이라도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밤낮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갔던 나다! 그러다가 중간에 아사할 뻔하기도 했지! 그런데 너는 뭐 대단해서 세상이 알아서 네게 넙죽넙죽 갖다 바친단 말이냐! 설마 전생에 나라를 구하기라도 했단 말이냐!] [하하하, 배 아파하지 마시오. 그냥 요즘에 좀 운이 좋은 것뿐이니. 그렇다고 준다는 걸 안 받을 수도 없잖소!] [운이라고 하기엔 너무 비정상적이라서 그런다! 뭐 이건 한두 번이라야지!] 엽현이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왜 이럴까?
왜 이리 운이 좋을까?
정말로 내가 선각자의 환생이라서 세상이 알아보는 것일까?
엽현은 이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저, 어르신. 혹시 제가 전생에 선각자였습니까?” “뭐?”
순간 노인이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글쎄다. 네가 실시간파워볼 보기엔 어떠냐?”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백발노인이 말을 아끼자 엽현은 다시 구층 존재에게 말을 걸었다.
[만약 내가 선각자의 환생이라면 천녀와의 관계는 어찌할 것이며, 이 미친 혈맥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소? 설마 선각자 역시 이런 혈맥을 지니고 있던 것이오?] [나 역시 그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다. 그러나 내 결론은 너는 선각자의 환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네가 천녀라 부르는 여자는 선각자를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네 혈맥은 선각자가 아닌 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겠지. 그러면 문제가 생기는데… 네 놈은 도대체 누구냐?] 너는 누구냐?
엽현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기에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네가 전생보다는 현생에 와서 우연한 기회를 잡았다고 본다. 그 기회가 하필이면 천녀라는 것이 문제지만. 그녀가 네 배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누가 감히 너와 적이 되겠느냐? 그 서영족과 무적종 멍청한 녀석들은 자신들의 말로가 어찌될지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놈들은 너와 싸워서 이겨도 망할 것이고, 져도 그 여자의 검에 모두 송장이 될 것이다. 불쌍한 놈들……. 잠깐 놈들을 위해 묵념 좀 해야겠구나.] 그 말을 들은 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녀가 자신을 언제까지나 보호해 줄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 였다. 파워볼게임
어쩌다 한 번씩은 모르겠지만, 결국 스스로를 지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했다.
이때 침묵하던 백발노인이 화제를 돌렸다.
“네 전생이 무엇이었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장미산으로 가는 길은 어쩌면 호락호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아야 한다.” 정신을 차린 엽현이 백발노인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엔트리파워볼 말입니까?” “이수경의 존재를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수경!
사실 구층 존재가 좋은 점만을 보고 있어서 그렇지, 엽현의 인생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만약 그가 이곳에 도착해서 소범의 강아지에게 영과를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살 수 있었을까?
한 번의 선행으로 삶과 죽음이 갈리는 것을 행운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백발노인이 말을 이어갔다.
“어찌어찌 안전하게 장미산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 촉룡은 이곳의 이수들에게 매우 위망이 높은 존재다. 비록 오래전 죽은 존재이지만, 여전히 많은 이수들이 이 주변을 지키고 있지. 이들은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들의 영웅에게 접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제가 비늘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네가 살아서 촉룡 앞에 도착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이 비늘을 얻는 것은 사실이다.” “어째서 말입니까?” 이때 백발노인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쳤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뭔 놈의 어째서가 그리 많느냐? 그래서 간다는 것이냐 안 간다는 것이냐? 만약 안 간다고 하면 두 개 검의 봉인을 풀어 줄 테니 그것만 갖고 떠나면 된다!” 장미산, 가야 할까?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을?
“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짧게!” “그… 제가 촉룡의 비늘을 가지고 오면 검의 위력이 얼마나 강해지는 것입니까?” “지금의 최소 열 배!” 열 배!
“그걸 왜 이제 말합니까!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막 자리를 뛰쳐나가려던 엽현이 돌연 소범을 향해 멈춰 섰다.

“아차차! 소범아, 나 EOS파워볼 혼자 다녀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 소범은 멀뚱히 엽현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냐, 아냐! 다 같이 가자!”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엽현은 소범의 손을 붙잡고 부리나케 달리기 시작했다.
이때 백발노인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져가는 엽현을 향해 소리쳤다.
“그럼 이 검들은 내가 맡아 놓고 있으마! 살아 돌아오너라!”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 어찌 됩니까?” “그럼 다 내가 먹는 거지!” “크…….” 순간 엽현은 기혈이 뒤틀리려는 것을 겨우 견뎌냈다. 노인이 얄미워서라도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한 엽현이었다.
그렇게 엽현과 소범이 로투스바카라 사라졌다.
노인의 시선은 손 안의 소칠의 검과 흑검으로 향했다.
“천하의 명검을 한 자루도 아니고… 세상에 저리도 재수 좋은 놈이 또 있을까?” * * * 장미산으로 향하는 길.
[너는 저 늙은이를 믿느냐? 또 함정이면 어쩌려 그러느냐?] [글쎄, 그러면 어떡하죠?] [흠, 하긴. 그가 널 처리하려 했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는 없겠지. 게다가 저 정도 되는 강자라면 자존심도 강할 테니까. 물론 예외는 있겠다만.] [나는 저 사람보다는 그대의 진짜 실력이 더 궁금하오. 그대는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있소?] [묻지 마라. 말해 줘봐야 네가 뭘 알겠느냐.] […….] 엽현은 더 이상의 잡담을 중지하고 어검술에 집중했다. 장미산까지의 여정이 꽤나 긴 탓이었다.
그렇게 빠르게 허공을 가르던 어느 순간, 엽현은 어떤 강력한 기운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이에 엽현이 사자후를 통해 온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천맥자가 나가신다, 비키지 않으면 오늘 저녁 국거리가 될 것이다!” 이에 엽현과 눈이 마주친 소범이 자신의 낡은 철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순간,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좋았어! 효과가 있다!
[이런 게 되는구나…….] “하하하하!” 엽현은 기분이 좋아져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범만 앞세우면 적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니, 이보다 신나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엽현은 전속력으로 장미산을 향해 날아갔다.

가는 중간 몇몇 이수들을 만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소범을 앞세우면 모든 것이 알아서 해결됐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천맥자라는 소범의 신분 탓도 있었지만, 괜히 소범의 길을 막았다가 뼈도 못 추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막힘없이 쭉쭉 나아간 엽현은 대략 반 시진 후, 장미산 문턱에 접어들었다. 바로 이때, 강대한 기운이 엽현과 소범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에 엽현이 항상 하던 대로 소리쳤다.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어서 천맥자에게 길을 내어주지 못할까!” “네놈이야말로 인간이 감히 어딜 들어오려는 게냐! 썩 꺼지거라!” “…….”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에 엽현은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바로 이때, 소범이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말소리가 들려 온 곳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는 것을 책망하는 것처럼.
결국 소범의 철검이 허공을 베었다.
서걱-!
찰나의 순간, 먼 쪽 하늘이 길게 갈라지며, 강력한 기운이 마치 강이 범람하듯 쏟아져 들어왔다.
쿠쿠쿠쿵…….
마치 금방 무너지기라도 할 듯 크게 뒤흔들리는 하늘!
소범은 아직 분이 덜 풀렸는지, 재차 검을 휘두르려 했다. 바로 이때, 그녀의 앞에 뱀의 몸을 가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맥자… 이 곳은…….” 상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소범의 검 끝이 한 점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어떤 기운도 담겨 있지 않은 순수한 일검이었다.
그러나 이 한 번의 단순한 동작은 상대의 안색을 파랗게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진수(鎮守)!” 남자가 황급히 오른손을 내밀며 소리친 순간, 콰쾅-!
그의 손에서 강력한 힘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남자의 팔 전체가 날카롭게 잘려나갔다.
재차 검을 들어 끝을 보고자 하는 소범.
바로 이때, 한쪽 상공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멈추시오!” 이 목소리와 함께 노인 하나가 소범과 엽현 앞에 나타났다.
노인의 몸집은 일반 사람보다 장대했고, 인간의 이목구비를 갖추고는 있었으나, 머리에는 하얀 뿔이 달려 있었다.
소범을 잠시 응시하던 노인은 엽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는 인간이군!” “그렇소.” 엽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긴 무슨 이유로 온 것이오?” 노인은 이 무리의 실권자가 엽현이란 것을 단번에 파악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인간을 대표하여 촉룡 어르신께 참배하기 위함이오.” 참배?
그 말을 들은 순간, 노인의 눈가에서 차가운 빛이 새어 나왔다.
“인간, 너는 나를 멍청이로 아는 것이냐?” “…….” 분위기가 급변함과 함께 사방에서 강대한 기운이 여기저기 들고 일어났다.
대장간 노인의 말대로 많은 이수들이 여전히 촉룡의 봉분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다소 흥분을 가라앉힌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인간, 이 땅은 우리 이수들에게 매우 신성한 곳이다. 우리는 인간이 그분의 영면을 방해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천맥자와 원수가 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가능하면 빨리 이곳에서 나가주길 바란다.” 이에 순순히 물러날 엽현이 아니었다.
“나야말로 부탁 좀 드리겠소. 단지 먼발치에서나마 그분을 만나보고 싶은 것뿐이오. 오래 걸리지도 않고 단 몇 초면 충분하니, 부디 허락해 주시오.” “인간!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으니 이만 돌아가거라!” 노인이 다시 차갑게 소리치자, 엽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보아하니, 대화로는 원하는 바를 얻기 어려울 듯싶었다.
어떡하지?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엽현은 고개를 들어 노인 뒤편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촉룡을 만나기만 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해결될 거란 걸 깨달았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정면 돌파뿐이다!
한편, 날카로운 눈으로 엽현을 응시하고 있는 노인.
사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그 곁에 있는 소범이었다.
상대는 무려 천맥자였다.
이때 엽현은 마음속으로 구층 존재와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구층 주민, 이 주변에 요수들이 얼마나 있소?] [셀 수 없이 많다. 강행돌파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전투가 벌어지면 천맥자는 살겠지만 너는 반드시 죽는다.] 강행돌파는 불가능하다?
이 말을 듣자 엽현이 돌연 표정을 바꾸며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헤헤, 우리 이러지 말고, 차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 나눕시다. 그러다 보면 또 싸우지 않고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 “…인간, 네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우리 역시 너와 원한을 맺는 것은 사양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촉룡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 가능한 빨리 이곳에서 나가 주었으면 한다.” “음… 아무래도 그대들 눈에는 내가 인간이란 사실이 불편한 것 같구려. 그러나……” 엽현이 갑자기 곁에 있던 소범을 앞세웠다.
“설마 천맥자라 해도 자격이 없는 것이오?” “…….” 노인은 소범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엽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내 말을 들어 보시오. 그대들은 물론 천맥자의 신분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런 천맥자가 좋은 마음으로 참배하러 왔다고 하면 촉룡 역시 기뻐하지 않으시겠소?” 이 말을 들은 노인이 엽현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물론 천맥자가 그분을 보러 간다고 하면 우리도 굳이 막을 명분은 없다. 하지만 인간, 너는…….” 순간 엽현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 자신에게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엽현이 차가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것이오.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아시오?” “나야 모르지.” “흥! 천맥자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도 짐작되는 바가 없소? 내가 정체를 밝히면 깜짝 놀라서 뒤집어질 걸!” 노인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정체를 밝혀 보던가.” “…….””